어느새 가을이 완연합니다. 무덥던 여름날인가 싶더니 이제는 찬바람이 아침과 저녁으로 불고 코스모스 꽃들도 피어나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이런 때 가을이면 생각나는 시(詩)를 읊어 보는 것은 달라지는 계절과 함께 작은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많은 상념이 오가는 계절, 가을입니다.
가을에 좋은 시
이런 때 가을에 읽어 보면 좋을 시 몇 편을 소개하여 드립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 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과 씨를 뿌려 놓아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김준엽 시인
가을
툭……
여기
저기
목숨 내놓는 소리
가득한데
나는 배가 부르다
나호열 시인
가을의 소원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안도현 시인
솔로몬의 계절
가을,
황금 들녘, 천고마비
풍요의 계절입니다.
아닙니다.
추풍낙엽, 스산한 산천
슬픔의 계절입니다.
그래요.
희로애락, 풍요와 빈곤
이율배반의 계절입니다.
미묘한 생각의 차이가 삶의 무게를 달리합니다.
이영균 시인
가을에는
가을에는 잠시 여행을 떠날 일이다
그리 수선스러운 준비는 하지 말고
그리 가깝지도 그리 멀지도 않은 아무 데라도
가을은 스스로 높고 푸른 하늘
가을은 비움으로써 그윽한 산
가을은 침묵하여 깊은 바다
우리 모두의 마음도 그러하길
가을엔 혼자서 여행을 떠날 일이다
그리하여 찬찬히 가을을 들여다볼 일이다
박제영 시인
가을에는
물소리 맑아지는 가을에는
달빛이 깊어지는 가을에는
하늘이 높아지는 가을에는
쑥부쟁이 꽃피는 가을에는
어인 일인지 부끄러워진다
딱히 죄지은 것도 없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가을에게
자꾸만 내가 부끄러워진다
강인호 시인
가을이 오면
나무야
너처럼 가벼워지면
나무야
너처럼 헐벗겨지면
덕지덕지 자라난
슬픔의 비늘
쓰디쓰게
온통 떨구고 나면
이 세상
넓은 캔버스 위에
단풍 빛으로 붉게
물감을 개어
내 님 얼굴 고스란히
그려보겠네
나무야
너처럼만 투명해지면
홍수희 시인
가을 편지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어가고 있습니다.
그 빈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 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 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이성선 시인
가을편지1
하늘 향한 그리움에
눈이 맑아지고
사람 향한 그리움에
마음이 깊어지는 계절
순하고도 단호한
바람의 말에 귀 기울이며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용서하며
산길을 걷다 보면
톡, 하고 떨어지는
조그만 도토리 하나
내 안에 조심스레 익어가는
참회의 기도를 닮았네
이해인 수녀 시인
가을
가을입니다
해질녘 먼 들 어스름이
내 눈 안에 들어섰습니다
윗녘 아랫녘 온 들녘이
모두 샛노랗게 눈물겹습니다
말로 글로 다 할 수 없는
내 가슴속의 눈물겨운 인정과
사랑의 정감들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해 지는 풀섶에서 우는
풀벌레들 울음소리 따라
길이 살아나고
먼 들 끝에서 살아나는
불빛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고 해가 가고 꽃이 피는
작은 흙길에서
저녁 이슬들이 내 발등을 적시는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
당신께 드립니다.
김용택시인
가을의 향기
남쪽에선 과수원에 능금이 익는 냄새
서쪽에선 노을이 타는 내음……
산 위엔 마른 풀의 향기
들가엔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
당신에겐 떠나는 향기
내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상(傷)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여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여……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이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김현승 시인
가을 들녘에 서서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홍해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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